김양보 호성공신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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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[편집]
조선 선조 시기의 내시였던 김양보를 호성공신 3등으로 봉하면서 내린 교서이다.
2. 상세[편집]
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, 전쟁 때 공을 세운 관료들을 공신으로 봉했다. 전쟁 때 세운 공적의 종류가 제각기 다르므로, 호성공신(扈聖功臣), 선무공신(扈聖功臣), 청난공신(淸難功臣)으로 나누어 봉했다. 호성공신은 선조가 몽진할 때마다 옆에서 따라간 사람들이고, 선무공신은 왜군을 물리쳤거나 명나라에 원군 및 군량을 요청한 사람들이며, 청난공신은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사람들이다. 그 중 김양보가 책봉받은 것은 호성공신이다.
김양보는 선조가 매우 아꼈던 내시이다. 정여립의 난을 진압할 때 선전관 이용준과 함께 정여립이 숨은 죽도를 포위하여 정여립을 자결케 한 적이 있었다.# 임진왜란 때도 선조 옆에서 어가를 모셨고 그 공으로 1604년(선조 37년)에 호성공신 3등으로 책록되었다.
이때 3등으로 봉해진 사람들은 총 53명인데 김양보의 이름은 23번째에 올랐다. 원래 김양보의 품계는 종2품 가의대부였는데, 이때 공신이 되면서 정2품 자헌대부로 승품했다. 그리고 포상으로 노비 7명, 토지 10결, 은전 5냥, 옷감과 말을 각각 하나씩 받았다.# 그러한 내용들이 이 공신록에 적혀있다.
당시 《공신록》의 작성 방식과, 선조가 공신들에게 어떤 포상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. 그래서 1992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받았다.
[1] 85호 《성시헌 익사공신록》과 86호 《열조통기》는 각각 제주특별자치도와 부산광역시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2010년 6월 10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해제시켰다.[2] 사진 출처 -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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